만리 35 년 (1607), 진사. 뇌관, 난징 인사부 우시랑, 제임스 부시랑. 위충현에게 미움을 사서 해고당했다.
숭정이 즉위 후 각료들은 추첨 방식으로 뽑혔고, 용은 첫 번째로 뽑혔고, 이어 라이 종도, 양이 뒤를 이었다.
장열제가 재위할 때 문연각에서 관, 신하, 태보 태자, 대학사로 일한 적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용과 육홍훈은 서로 협조해 현장 사무가 좀 명랑하다. 그는 위충현의 역안 심리를 주재했고, 매국노는 그를 뼈에 사무치게 미워했다.
전융희는 원숭환을 동북관녕 (금산세관, 닝원) 군 총사령관으로 적극 추천하여 변방을 공고히 하였다. 원숭환이 털을 죽였을 때, 원숭환과 공모하여 대신을 잘 살해하여 탄핵을 당했다. 그래서 그는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당시 위충현 여당은 원숭환, 전룡희를 비방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1630 원숭환이 살해된 후 돈융희는 원안 사건에 연루돼 사형을 선고받았다. 일부 신하들이 명나라 숭정 황제에게 극력 탄원하는 후 사형에서 면제되었지만 구금되었다. 결국 전룡희는 장기간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후 정해위를 지키도록 파견되었다. 집에 돌아온 후, 그는 다시 이 곁으로 돌아갔다. 오래지 않아 병으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