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흥사는 영강의 강변, 금산 기슭, 고대 성벽 안에 위치하여 타이주 제 1 사이다. 당나라 이래로 이곳은 이미 중일 불교 문화 교류의 중요한 장소가 되었다. 천보년, 사승도사, 동전 불법과 함께 천태종 이야기, 천대장, 그리고 직접 건칠 제닌 좌상을 만들어 일본인들에게 국보로 추앙받아 일본 조각 예술의 선례를 세웠다. 정원년, 일본 승려들은 처음으로 당학에 입학하여 서융흥에서 체류하고 149 일 동안 천태종 관을 공부하고, 경전을 베껴 쓰고, 보살에게 계율을 주었다. 귀국 후 그들은 일본에 천태종 창립을 했다. 후세 사람들은 역대로 일본 승려 원직, 영, 성훈, 주연이 연이어 배우러 왔다. 절은 당신룡 원년 (705) 에 건설되어 초명 중흥, 후명 융흥 () 에 세워졌다. 역대 왕조는 개원 경덕 숭녕 소광 등 여러 차례 이름을 바꾸었다. 원나라 이후에는 모두 천녕이라고 부른다. 유유고사, 천년사, 명승이 배출되고, 사서명가, 인걸지령, 원대에는 산이 하나 있는데, 이름은 동방에 걸려 있다. 근대 이래 중국과 일본 학자들이 근원을 찾으려고 노력한 것이 마침내 증명되었다. 재건된 용흥사는 모조당 건물로 우아하고 소박하며 대범하고 색다르다. 용흥사, 중국의 유명한 스님, 양주시 강양현 (현재 장쑤 성 양주시) 사람. 감진스님 14 세에 출가하여, 26 세가 되었을 때 이미 각 집안의 길고 명성이 자자한 법가의 대가였다. 당천보 원년 (742 년) 10 월, 일본 학승영예, 조박경 감진 제자 도행 추천, 양주 대명사에 가서 감진을 찾아뵙고, 대스님을 일본에 초청하여 일본에 법을 전하다. 그는 4 만여 명의 승려를 위해 계계를 받았는데, 그중에는 앞으로 유명해질 스님도 적지 않다. 그는 중국 동부 지역의 부계 대사로 칭송받아 불교도들 사이에서 지위가 높아 불교측의 주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