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의 조상은 육지에 사는 동물이다. 나중에 생존을 강요받아 그들은 무수한 세기의 진화를 거쳐 사지를 잃고 거대한 어신을 갖게 되었다. 고래는 물고기처럼 보이지만 물 속에 사는 포유류일 뿐이다. 우리처럼 영혼과 육체는 함께 있지만 형태는 다르다. 고래는 물고기가 아니지만 바다를 집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외부와 어울리지 않고 평생 떠돌아다닐 운명이다.
고래는 지구상에서 가장 큰 생물이다. 나는 그들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변장 껍데기를 겹겹이 걸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경험이 너무 많기 때문에 이 위장이 이렇게 심오하다.
몇 톤에 달하는 파란색은 바다에서 가장 신성불가침의 사자이다. 그들은 지느러미를 날개로 바꾸고, 바다를 푸른 하늘로 여기고, 성인의 자세로 날아다니며, 바다의 평온을 지킨다. 떠다니는 고래는 우리가 줄곧 추구해 온 자유가 아닌가?
모든 고래는 바다의 한 섬으로, 모든 섬에는 순수한 영혼이 숨어 있다. 고래는 일생동안 영혼을 가지고 사방을 떠돌아다니며 허황된 꿈을 쫓고 있다.
고래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앨리스라는 고래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다. 앨리스는 태어날 때부터 발성 주파수가 52 Hz 이고, 정상 고래의 발성 주파수는 52 Hz 미만이다. 이는 다른 고래와 정상적으로 소통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앨리스는 혼자 살 수 밖에 없었고, 친구도 없고, 비슷한 관심도 없었다.
앨리스의 운명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깊은 바다에서 오래 살았을지 모르지만, 항상 외로웠다. 아마도 그것은 자신의 주파수의 고래를 찾았을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외롭지 않다.
우리 사이에도 앨리스가 많다. 그들은 항상 아무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항상 다른 앨리스를 찾고 있다. 불행히도, 행운의 사람은 항상 적다. 70 억여 명 중에서 자신과 비슷한 사람을 찾는 것이 얼마나 쉬운가?
고래가 떨어지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고래의 생명이 끝에 이르면, 그들의 시체는 심해 해저로 가라앉아 성대한 행사에 참석할 것이다.
그들의 시체는 점차 물고기와 새우에 의해 잡아먹히고, 분해자에 의해 분해되어 수많은 새로운 생명을 낳고, 결국 썩어 진흙으로 변하고, 거대한 골격만 일부 생물에게 망명을 제공하게 된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믿음명언) 이 과정을 고래 상륙이라고 한다.
고래가 상륙하는 것은 고래가 바다에 남겨준 마지막 부드러움이다. 비록 그들의 생명이 끝나도, 그들은 여전히 깊은 바다의 다른 생명을 위해 부드러운 고향을 만드는 것을 잊지 않는다. 고래는 태어날 때부터 비범해서 장렬하게 죽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죽으면 원망도 후회도 없고, 텅 빈 세상 속을 걸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죽음명언) 나는 고래처럼 웅장한 것을 추구하지 않고 고래처럼 냉정하다.
결국 우리는 모두 고래가 되어 바다에서 자유로워지고 고독은 늙어간다. (조지 버나드 쇼, 고독명언) 우리는 먼 곳의 북두칠성을 볼 수 있고, 높이 솟은 거대한 파도를 만날 수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서식하는 새 한 마리를 사랑하게 될 것이고, 우리는 바다와 하늘이 결국 두 세상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점점 멀어질 것이고, 우리는 지나간 것은 남길 가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결국 떠돌아다니는 것에 지쳐서 불꽃처럼 피어나는 곳을 찾을 것이다.
바다로 향하는 고래처럼, 생은 자유를 쫓는 섬이고, 죽음은 바다 속의 현란한 별빛이다. (조지 버나드 쇼, 죽음명언)
만리는 해저에 있고, 기꺼이 죽고, 조용히 숨을 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