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문화의 혈맥을 보존하다
첫째, 60 년 동안 홍콩은 중국 전통문화의 흔적을 보존하여 중국의 미래 발흥의 문화적 기초와 사상의 연원이 되었다. 1950 년대와 1960 년대에 내지의 전통문화는 멸종 위기에 처해 있었고, 전무 (), 당군이 (), 모종삼 (), 장군권 () 등의 학자들은 항구에 서원을 설립하여 국학을 추진하고' 신유가 ()' 를 창설하여 지금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고대를 거울로, 세대평화' 의 용기와 결의로' 중국문화선언' 을 발표하고 세계인민에게 중국문화를 선전했다. 이런 학자들은 많은데, 어떤 학자들은 홍콩을 떠나 대만성이나 구미로 갔지만, 홍콩은 줄곧 그들이 중국을 연구하고 중국 문화를 가르치는 중요한 기지였다.
둘째, 홍콩은 대량의 오래된 기예, 숫자 등 민간 문화를 보존하여 많은 사람들이 내지에서 실전되었다. 예를 들면 영춘권, 채립불, 두루미 등이 있습니다. 이것은 남방 무술로, 1950 년대에 대륙에서 연습과 교육을 엄격히 금지했다. 1980 년대에 내지에서 이런 무술을 발전시킬 때는 홍콩에서 스승을 청해 본격적인 쿵푸를 가르쳐야 했다. 영춘권은 엽문이 홍콩에서 광대를 발양하고 제자에 의해 세계로 밀려난다는 것이다.
또 광동극도 있어 문혁에서 면모를 완전히 바꾸었지만 홍콩에는 대대로 명가가 나타났다. 더욱이, 소위' 궤변사도', 즉 내지인이 실전한 각종' 환상수' 가 있는데, 예를 들면 모산도학, 관이도학, 풍수 점술 등이 지금도 홍콩에서 전해지고 있다. 게다가, 이 기술들이' 찌꺼기' 인지, 버려져야 하는지,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우리 민족의 역사적 기억의 일환으로, 전통 활성화석으로 보존된 것도 의미가 있다.
셋째, 중국의 전통 사회 조직은 홍콩에 유보되어 있다. 명청 이래 중국이 형성한 종족을 유대로 한 농촌 사회 형태는 청말 혼란과 민국 사회운동을 거쳐 큰 변화가 없었지만 1949 부터 사라졌다. 수천 년 동안 중국의 느린 사회 형태는 이때 도약과 단층식의 진화를 겪었다.
그러나 홍콩의 신계에는 중국 전통 농촌 사회 형태의 잔재가 있다. 대륙에는 단층진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영국 식민지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 이곳의 민사 법률 관계는 오랫동안 대청의 법률에 기반을 두고 있다. 여기에 보존된 시골 조직, 부계 활동, 부계 윤리는 영남 지역의 특색을 가지고 있지만 식민지 통치를 거쳐 계승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귀중한 일이다.
민족 상업 전통을 계승하다
또한 경제의 특징 중 하나는 홍콩이 지난 60 년 동안 중국의 민족 자본주의와 민족 상업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는 점이다. 모두 알다시피 1949 이후 많은 자본가들이 내지에서 홍콩으로 이주하여 방직업과 같은 발전을 이루었다. 홍콩으로 이전한 자금, 기술, 설비는 홍콩의 첫 번째 경제 전환 (중계무역에서 가공무역까지) 뿐만 아니라 그해 홍콩 경제의 도약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이 자본가들은 홍콩 경제에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중국 민족 자본주의의 발전을 이어가고 발전시켰다. 그들은 1920 년대와 1930 년대 상하이 자본주의 발전의 황금시대를 이어받아 70 년대 말에 중국의 개혁 개방을 시작했다.
이 민족자본가들은 대소를 막론하고 생존 발전을 할 수 있으며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축적된 입소문과 브랜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이는 그들의 생존의 근본이 되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홍콩의 중국 민족 상업 문화에 대한 공헌은 무시할 수 없다. 그것은 중국의 70,80 년대 개혁 개방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우리의 과거 개혁개방이 홍콩의 자금, 기술, 경험을 대량으로 흡수하고 차용했지만 홍콩 요인의 문화적 가치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홍콩에 남아 있는 중국 전통문화와 상업문화에 적극적인 요소를 재발견하고 중시하는 것은 중국의 미래 발전에 지도 역할을 할 것이며, 중국의 부상의 중요한 내포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