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방의 어머니가 고향에 계시기 때문에 양방은 헌종에게 그의 동생 김일위진 푸량덕이 자주 수도와 신회 사이를 오가며 연로한 어머니를 제사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양덕은 기회를 틈타 광동 각지에서 꽃과 나무와 짐승을 채집하여 개인 신분으로 황제에게 공물을 바쳤다. 그가 사용하는 선박, 차량, 운반공, 식품 포장 등 모든 비용은 정부가 공급하여 지방관민의 재앙이 되었다. 따라서 광둥 좌사 소붕은 양방의 소홀함을 비난했다. 양방은 분노하여 함종진을 비방하고 소붕을 구이저우로 이송했다. 형부 상서 임준도 양방과 중희효를 탄핵해 감옥에 들어갔다.
양방은 늘 궁중의 돈을 헤프게 쓴다. 얼마 후, xianzong 내부 도서관 검사 에 갔다, 여러 왕조 가 축적 된 일곱 금 의 라이브러리 가 다 써 버린 것을 발견했다. 그는 양방과 또 다른 내시 위성에게 말했다. "이것은 모두 너희 둘 때문이다." 위흥은 감히 대답하지 못했지만 양방은 "주현궁과 각종 사찰을 짓는 것은 폐하께서 영원히 행복하시기를 기원하기 위한 것" 이라고 변명했다. 헌종은 기분 나쁘게 말했다. "나는 너의 트집을 잡지 않을 테니, 나중에 사람들이 너와 결판을 내겠다." 양방은 매우 무서워서, 그녀는 황제를 설득하여 태자를 폐지하고, 왕을 태자로 바꾸라고 로비했다. 이때 태산이 반복해서 흔들렸을 때 점쟁이는 이 천상이 태자에게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Xianzong 두려워, 그래서 일어나지 않았다.
성화 21 년 (1485) 에는 유성이 하나 있는데, 소리가 우레와 같다. Xianzong 두려워, 그래서 그는 진실을 보고 편지를 쓰고, 도로 관계자 편지 탄핵 liangfang 등 을 허용 했다. 헌종은 그의 대신을 책망하지 않았지만, 그는 여전히 양방을 처벌하지 않았다.
성화 23 년 (1487), 헌종이 승하하고 효종이 황제를 불렀다. 양방은 남경에서 저급 주관으로 하강되어 국가 사무를 교란한 죄명으로 퇴직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양방은 얼른 그에게 주었던 강원관전과 영경장전을 돌려주었다. 나중에 양방은 줄곧 활성화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