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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미라 전투

고가미라 전투

기원전 33 1 은 마케도니아와 페르시아의 운명을 결정하는 해다. 겨우 22 세인 마케도니아 왕은 페르시아 제국의 반쪽을 빼앗아 다리우스 3 세를 매우 화나게 했다. 다리우스는 전국의 힘을 모아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더와 결전을 벌이기로 했다.

첫째, 3 월

기원전 33 1 년 여름에 알렉산더는 이집트에서 온 군대를 직접 이끌었다. 이때 마케도니아 왕은 이미 이집트와 페니키아의 왕이 되었다. 그는 성공적으로 아프리카와 중동의 넓은 땅을 자신의 후방으로 변모시켰고, 페르시아를 결전할 시기는 이미 무르익었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유프라테스 강으로 와서 강 동쪽 기슭에 다리를 놓고 있는 파미니 군대와 합류한다. 다리우스는 원래 시리아 전 총독 마자아스가 이끄는 3000 기병 (그리스 용병 2000 명 포함) 을 파견하여 이곳을 지키게 했지만, 마자아스는 이수스에서 알렉산더에게 겁을 먹었다. 알렉산더가 군대를 이끌고 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철수했다. 알렉산더는 순조롭게 강을 건넜다. 부대가 강을 건넌 후 알렉산더는 멈추고 쉬라고 명령했다.

강을 건너고 나흘째 되는 날 정찰병은 멀지 않은 평원에서 적군이 발견되어 1000 을 넘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알렉산더는 즉시 기병 부대 몇 대를 이끌고 신속하게 추진했다. 이 페르시아 기병들은 다리우스를 위해 일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알렉산더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공격하는 것을 발견하자마자 즉시 항복하여 알렉산더의 포로가 되었다. 알렉산더는 다리우스의 군대가 그리 멀지 않은 고갱미라 마을에 있다는 것을 그들의 입에서 알게 되었다.

다리우스는 줄곧 군대를 모아 알렉산더와 새로운 결전을 벌이려고 시도했다. 전략적으로 볼 때, 다리우스가 전쟁터에서의 대규모 전투를 통해 알렉산더를 물리쳤다는 생각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이수스는 다리우스가 전쟁터에서 알렉산더의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했다. 다리우스가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청장 정책을 채택하여 마케도니아 군대와 진지전을 벌이지 않고 철수하여 길을 따라 있는 도시를 파괴하는 것이다. 알렉산더는 적의 점령지에서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이 도시들의 전리품 지원을 받지 못하면 군대의 보급이 어려워져서 적의 점령지인 왕양대해에 빠지고 지치게 될 것이다. (데이비드 아셀, Northern Exposure (미국 TV 드라마), 전쟁명언) 이것은 알렉산더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다. 하지만 다리우스와 페르시아 장군들의 맹목적인 오만과 오만함은 그들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않거나 경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경쟁하는 것을 더 좋아했습니다. (데이비드 아셀, Northern Exposure (미국 TV 드라마), 전쟁명언)

둘째, 대립

다리우스는 이 전투를 위해 충분한 준비를 했다. 다리우스는 가능한 한 많은 군대를 모았는데,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역사가들은 페르시아 군대가 8 만 명 정도 될 것으로 추정하여 알렉산더가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을 훨씬 능가했다.

포로의 입에서 다리우스의 군대를 알게 되자 알렉산더는 즉각 공격하지 않고 부대를 제자리에 세우고 나흘간 푹 쉬게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즉각적인 공격을 주장하지만, 파미니와 유럽만이 우리가 잠시 야영을 하여 전쟁터와 적의 배치에 대해 전면적이고 세밀한 정찰을 할 것을 건의합니다. (데이비드 아셀, Northern Exposure (미국 TV 드라마), 전쟁명언)

알렉산더는 파미니오의 의견을 받아들여 부대가 전투 순서에 따라 현지에서 배치하고 현지에서 야영하게 했다. 알렉산더는 직접 정찰병을 이끌고 미래의 전장에 대해 상세한 정찰을 진행했다. 그가 돌아온 후 장군들을 소집하여 간단하지만 도발적인 전전 동원을 했다. 그는 감화력과 호소력이 뛰어난 언어로 장병의 투지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연설에서 다가올 전투는 아시아 주권 문제를 해결하는 전투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전투에서 자신의 영웅의 본색을 보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알렉산더의 격앙된 연설로 장군들은 크게 고무되어 젊은 왕에게 군령을 내렸다. 알렉산더의 냉정함과 승리에 대한 믿음과는 달리 다리우스 측은 공황과 긴장 상태에 있다. 다리우스는 알렉산더의 야간 기습 공격으로 병사들이 무장하고 불안해하는 것을 두려워했다. 양군이 만나기 전에 승리의 저울은 이미 알렉산드리아 쪽으로 넘어갔다.

셋째, 고가미라 개선

전투는 기원전 33 1 년, 기원전 1 년 10 월, 기원전 1 년 새벽에 시작되었다. 모든 것이 준비되자 알렉산더는 말을 타고 오른손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며 신들이 마케도니아인과 그리스인에게 망명과 힘을 주시기를 기도했다. 그의 점쟁이 아리스텔은 알렉산더의 머리 위로 날아가는 독수리 한 마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고, 독수리는 즉시 사람들의 시선 아래 적진으로 날아갔다. 이 장면은 군중을 흥분시키고 그들의 용기를 배가시켰다.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알렉산더는 전군을 이끌고 우익으로 전진하여 자신의 우익이 페르시아 군대의 좌익을 마주하게 했다. 다리우스의 군대는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취하여 그의 좌익을 알렉산더의 우익 너머로 확장하여 측면을 형성하였다. 페르시아 군대도 기병을 동원하여 알렉산드리아 군대의 진로를 가로막았지만 마케도니아군에 의해 해산되었다. 알렉산더는 군대를 이끌고 계속 오른쪽으로 밀고 페르시아 진지를 넘었다. 다리우스는 즉시 그의 좌익 공격수 부대에게 알렉산더의 우익을 포위하여 우익으로 뻗어 험한 구릉지로 들어가는 것을 막으라고 명령했다. 알렉산더는 다리우스의 의도를 이해하고 그리스에 기병을 고용하여 공격하라고 명령했고, 그 결과 쌍방이 난투를 벌였다.

다리우스는 알렉산더가 계속 그를 밀면 그의 병거가 평평한 지역에서 밀려 울퉁불퉁한 땅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다리우스는 병거가 돌격하도록 명령했고, 네 마리의 말이 끄는 병거가 한 대씩 이어졌고, 밝은 칼이 마케도니아 군대로 돌진해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 앞에 있는 궁수와 창병이 병거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페르시아 병거는 즉시 총탄비에 빠졌고, 전마와 병거 병사들이 잇달아 쓰러졌다. 마케도니아의 경비병들이 돌진하여 칼을 휘두르며 수레를 끄는 말을 베었고, 많은 병거 병사들이 끌려갔다. 가로막은 전차를 뚫고 방진에 접근했을 때, 방진 병사들이 그들을 막지 않고, 명령에 따라 분리되어 그들을 차에 태우고 하나씩 소멸시키는 것을 발견하였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전쟁명언)

페르시아 병거가 돌격할 때, 비세우스의 기병은 알렉산더의 우익을 공격하여 마케도니아 그리스와 기병을 고용하여 난투를 벌이고 있었다. 다리우스는 공세를 강화하기 위해 양익의 기병들에게 좌익의 알렉산더와 우익의 파미니오를 모두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알렉산더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은 기병대는 왼쪽으로 달려가 마케도니아 창병과 궁수의 공격을 피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페르시아 기병들이 왼쪽으로 달려갔고, 페르시아 군대의 전선은 즉시 약한 틈으로 변했다.

넷째, 다리우스는 전투에서 도망쳤다

알렉산더는 즉시 이 잠깐의 기회를 잡아서 경비병을 이끌고 신속하게 적진 틈새에 삽입했다. 그들은 전투 구호를 외치며 다리우스로 돌진했다. 대류토의 수비는 신속하게 저항하고, 육박전, 전투가 매우 격렬하다. 다리우스의 경비병이 찔려 죽었다. 다리우스는 마케도니아 방진이 접근하는 것을 보자마자, 지휘 책임을 포기하고 병사들을 버리고 말머리를 돌려 도주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이때 그를 추격하는 것을 잊었다. 파미니의 좌익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에, 그는 서둘러 그를 지원해야 했기 때문이다.

알렉산더가 파미니로부터 지원서를 받는 순간, 알렉산더가 다리우스를 추격하기 위해 출발했을 때였다. 그는 즉시 스승으로 돌아가 페르시아 기병의 왼쪽 후방으로 돌아서서 파미오와 협력하여 페르시아 기병의 전후 협격을 형성했다. 이때 비세우스가 이끄는 페르시아 좌익 기병도 이곳을 포위했다. 쌍방 기병이 정면으로 만나 기병 대전이 벌어졌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창과 조직형을 던질 수 없어 얼굴을 맞대고 육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전투에서는 적을 죽여야만 생존할 수 있기 때문에 전투가 매우 격렬하다. 알렉산더의 경호원 60 명이 전쟁터에서 전사했고, 허비신을 포함한 몇몇 파트너들이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다리우스의 첫 번째 탈출은 군대의 사기를 흔들었고, 고전한 페르시아 우익과 비구스가 이끄는 기병도 무심코 싸웠다. 페르시아군은 전선에서 궤멸하여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알렉산더는 즉시 방향을 바꿔 다리우스를 어둠까지 추격한 다음 기병을 한밤중에 쉬게 한 다음 전쟁터에서 35 마일 떨어진 아벨라 읍으로 추격했지만 따라잡지 못했다. 알렉산더가 파미니와 유럽의 위기를 해결하는 데 너무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이수스와 마찬가지로 다리우스 자신도 도망쳤지만, 그의 병거와 활과 화살은 알렉산더의 전리품으로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