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찍이 서기 153 년, 산시 함양남관에는 많은 책을 읽은 선비 초영이 약 채취를 좋아하다가 장쑤 모곡산 화양동에 와서 수행을 했다. 모곡과 모중 이후 그들도 이곳에 와서 깨달음을 실천했다. 삼모군은 고생을 마다하지 않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더위와 추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서리와 눈을 두려워하지 않고, 초가집에 살고, 초가집에 누워 초가침대에 누워, 모근을 먹고, 밤낮없이 약을 채취하고, 단을 단련하고, 국민을 위해 병을 치료하고, 돈을 받지 않는다. 삼모군이 나타나자 백성은 고마워했고, 나무 편액은' 요구가 있으면 반드시 들어준다', 곡산을' 모산' 으로 바꿔 불후의 기념으로 삼았다.
삼모군이 신선이 되어 학을 타고 날다. 나중에 모산은' 상청경' 을 널리 퍼뜨렸고, 위부인과 양을 창시자로 삼아' 상청대동' 과' 경' 을 배웠다. 이 학파의 창시자는 남조제량 유명 도희경입니다. 그는 지식이 해박하여 저술이 매우 풍부하다. 그는 양무제의 고문으로' 산중재상' 이라고 불린다. 도희경은 40 여 년 동안 모산에 은거해 모산을 상청파의 중심지로 삼았는데, 일명 모산파라고도 한다.
모산 상청파는 도교의 중요한 유파이다. 송원 시대에는 모산, 용호산, 갈조산이 함께 강남도교인' 삼산복록' 이라고 불렸는데, 정일파 제 38 대 석천장옥이 직함을 얻었다.
최고봉 때 모산에는 257 개의 절과 5000 여 채의 집이 있었다. 모산의 가장 오래된 절은' 숭서만수궁' 과 푸원만녕궁, 줄여서' 은궁' 이다. 산에는 세 개의 아홉 대가 있다. 구천만복궁은 현재 모산도원의 집이고, 모산도장은 75 대의 후계자 주일정이다. 오늘의 모산은 꽃향기가 넘치고, 유람객들은 구름처럼, 삼모군에 대한 경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성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