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셰익스피어의 문제. 생존은 미지의 것을 의미하고, 죽음은 허무함을 의미한다. 미지의 것은 무서운 것이다. 왜냐하면 광대한 우주 앞에서 우리는 너무 작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미지의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애썼기 때문에 고대에는 점쟁이, 점성가, 예언자가 있었다. 우리는 이제 점쟁이와 점성가가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 예언가는 수백 년 혹은 수천 년 후의 세계가 어떤 모습일지 예측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는 내일의 자신이 어떤 모습일지 예측할 수도 없다. 사실, 인간은 항상 자신의 미래를 예측하고 통제하려고 애썼지만, 그럴 수 없다는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템페스트, 희망명언) 칭기즈칸은 그의 채찍으로 세상을 가르쳤지만, 그는 꿈이 완성되기 전에 우울증으로 죽었다. 알렉산더 대왕의 운명도 마찬가지다. 인류의 가장 걸출하고 위대한 인물도 이런 운명을 피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시종일관 인간일 뿐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을 예견할 수 없다. 전능자는 신이다. 사람들은 하느님이 전능하시고, 하느님이 자신의 미래를 예지하실 수 있다고 믿으며, 하느님이 궁극적인 지혜의 전달체라고 믿는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신을 믿고, 신이 그의 미래를 예견하고, 그의 인생 방향을 인도할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신념이 얼마나 확고한지,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것을 얼마나 두려워하는가. (서양속담, 믿음속담) 아니, 알 수 없는 것은 영원히 허무와 같을 수 없다. 마치 생존이 영원히 죽음과 같을 수 없는 것과 같다. 허무와 미지의 차이는 희망에 있다. 자신의 생각을 지배하고 자신의 운명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 사람이 이미 미래와 인생에 대한 희망을 잃고 자신의 생각을 지배할 수 없고, 운명을 마음대로 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그가 이미 죽었다고 말할 수도 있고, 혹은 한 단어로 그를 산송장이라고 묘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이런 사람이 너무 많지 않나요? 웃지 마, 아마 네가 이 문장 보고 있을지도 몰라. 나는 생존을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나는 미지의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나는 미지의 것이 무섭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미지의 것이 두렵다. 머리 속에는 너무 많은 복잡하고 지저분한 문제들이 가득하다: 우리가 왜 왔는지, 왜 가는지, 우리가 속한 곳 우리 삶의 궁극적 인 목표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 시대, 이 사회, 이 나라, 이 세상의 닭소리가 사실입니까? 이 나라의 미래가 있는 곳, 희망이 있는 곳, 출구가 있는 곳; 내 자신의 미래는 어디에 있고, 나의 희망은 어디에 있고, 나의 출구는 어디에 있는가;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 진실하고, 필요하고, 정확합니까? 너무 많은 미지의, 너무 많은 질문은 내가 생각하고, 답을 찾고, 나, 심지어 나 자신도 생각해야 한다. (존 F. 케네디, 생각명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