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젊었을 때 왕위에 올랐다. 당시 그는 정무를 처리할 능력이 없었고, 그의 할머니, 당시의 태후에게만 의지할 수 있었다. 당시 왕태후는 형세에 적응하기 위해 개혁을 진행하여 녹봉 제도를 제시하여 이전의 유목민족의 습관을 뒤엎었다. 즉, 북한에서 벼슬을 하는 사람은 녹봉을 받을 수 없고, 녹봉은 약탈해야 한다. 이후 왕태후는 선비요술 폐지, 존공, 이족 통혼 금지 등 일련의 개혁을 진행했다.
어려서부터 자희태후의 보호 아래 살던 효문제는 사상적으로 자희태후와 매우 닮았다. 자희태후가 죽은 후 효문제가 무대에 올랐지만, 이러한 개혁은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효문제의 통치하에 조정에서 선비의 바람이 더욱 거세졌다. 효문제는 수도 낙양을 옮겼을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한자, 즉 한화, 한자 쓰기를 대대적으로 추진하고, 선비인과 한인 통혼을 장려했다.
이런 선비인을 진압하는 극단적인 방법은 선비인의 극심한 보이콧을 받았다. 태자가 변법에서 선비 귀족과 결탁했기 때문에 효문제는 태자가 선비와 한족을 분열시킬까 봐 태자를 서민으로 폄하하였다. 그 후 태자는 여전히 단념하지 않고 반란을 일으켜 효문제에게 처형당했다. 북위 멸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지만 북위 멸망의 최종 원인은 효문제 개혁이 너무 급진적이어서 융통성을 모르기 때문이다.